드림 산악회

http://club.koreadaily.com/dreamhikingclub
전체글보기 클럽방명록
 
  클럽정보
운영자 산남자
비공개 개설 2013.09.25
인기도 15843718
회원 968명
드림 세상 
공지 사항 (60)
회원가입란 (506)
드림 공유 (4505)  
모든모임후기 (64)
번개/캠핑/여행 (112)
드림 글방 (266)
등산/여행/취미 
등산수칙/상식 (1028)
산행 계획 (605)
산행 사진 (665)
여행/사진/영상 (290)
식물/약초/약차 (786)  
세계여행/별미 (749)
자유사진/추억 (911)
요리/취미,여가 (1381)  
포토 에세이 (135)
음악/영화/연예/스포츠 
가요/가곡 (1146)
팝/외국곡 (473)
음악 정원 (348)
영화/드라마 (448)
연예/스포츠 (927)
패션의 모든것 (526)
마음의 양식 
좋은글/명언 (2972)
자유 게시판 (5125)  
건강/일반상식 (6407)  
추억의 사진,댓글 (401)
유익 정보/지식 (3809)  
생활 상식/운동 (3819)  
문학/수필/자유시 (631)
감동글,사진,영상 (676)
느끼며 생각하며, (784)
놀라운영상/사진 (516)
오늘의 스토리...! (317)
쉼터 
끝말 이어가기 (605)
유머글/코미디 (994)
환경/화제 뉴스 (1190)
고전/현대 아트 (258)
역사/다큐/과학 (768)
코밐/사진 영상 (481)
나눔/힐링글영상 (774)
이름있는 사람들 (440)
황당한이슈,사진 (1087)
이런저런 이야기 (2949)
동물/사진/동영상 (448)
믿기어려운/사실 (299)
추천링크
가판대-모든신문을 여기서
MBN 종합방송
JTBC 방송 (중앙)
CHANNEL A (동아)
TV 조선
지역별 실시간 날씨
R E I 스포츠용품
SPORT CHALET
BIG 5 스포츠용품
SPORTS AUTHORITY
캠핑의 모든 필요용품
Walmart
 
TODAY : 8877명
TOTAL : 27393097명
오늘의 스토리...!
작성자  산남자 작성일  2019.05.17 02:09 조회수 295 추천 0
제목
 은둔의 독재형 리더십, IKEA 잉바르 캄프라드 - 리더는 시간, 돈 그리고 사람을 아껴야 한다  
 
은둔의 독재형 리더십, IKEA 잉바르 캄프라드 - 리더는 시간, 돈 그리고 사람을 아껴야 한다


5살에 동네 사람들에게 성냥을 팔고, 11살에는 자신이 번 돈으로 자전거와 타자기를 사고, 17살에 회사를 창업한 위대한 상인 잉바르 캄프라드. 그가 만든 이케아는 현재 전 세계에서 다양한 제품과 함께 ‘문화’를 팔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캄프라드가 이케아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성공의 요인은 시간, 돈 그리고 사람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상인

지난 1월27일 스웨덴 발 뉴스가 세계로 타전됐다. 뉴스는 “스웨덴의 스몰란드 자택에서 이케아의 창업주 잉바르 캄프라드가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것.

잉바르 캄프라드는 불과 17세인 1943년에 이케아를 창업했다.
이케아의 시작은 카탈로그 판매, 일종의 잡화점이었다. 창업 후 75년이 지난 지금, 2017년 기준으로 이케아는 매출 470억 달러(약 52조 원), 약 49개국 시장, 412개 매장에서 19만 명의 종업원이 2만여 종의 상품을 갖추고 10억 명의 고객을 맞고 있는 종합유통기업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두 개의 매장을 열었고 그중 광명 매장에서만 2017년 365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런 이케아의 기업적 성공도 놀라운 것이지만 잉바르 캄프라드의 개인 재산도 거의 천문학적이다. 블룸버그는 잉바르 캄프라드를 세계 부자 순위 8위에 올리며 약 587억 달러, 한화 63조 원의 자산가라고 평가했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인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재산 23조 원의 거의 3배에 육박하는 규모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자수성가로 부를 이뤄냈고 특히 그가 창업한 이케아는 H&M그룹과 에릭슨, 사브, 일렉트로룩스 등을 보유한 발렌베리그룹과 함께 스웨덴을 대표하는, 스웨덴이 자랑하는 기업이 되었다.

잉바르 캄프라드를 유명하게 한 것에는 이케아의 성장, 캄프라드의 리더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세상 억만장자 중에는 적수가 없다는 그의 절약과 구두쇠 정신에 관한 일화들이다. 비행기 이코노미석, 출장을 가던 한 회사원의 옆 좌석에 수수한 옷차림의 노인이 앉아 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리려는 회사원에게 노인이 자그마한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노인은 “이것을 받게. 아마도 요긴하게 쓰일 것이네”라는 말을 남겼다. 남자는 노인이 건네준 종이를 펴보았다. 그것은 비행기 안에 있는 잡지에서 오려낸 아이스크림 할인 쿠폰이었다. 남자는 별 생각 없이 그 쿠폰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그 노인이 세계에서 10위 안에 드는 억만장자인 잉바르 캄프라드인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또 있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스위스 로잔 예술학교에 기부를 했다. 그가 오랜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그가 타고 온 자동차가 기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차는 1993년 식 볼보 240GL. 세계 최고의 부자가 타고 다닐 차는 아니었다. 기자들은 그에게 “아직도 이 차를 타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잉바르 캄프라드는 “아직 15년밖에 되지 않은 새 차이고 멀쩡하다. 불편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네덜란드에서 22유로(약 3만 원)나 주고 이발을 했다”고 후회하고, 옷은 벼룩시장에서 사 입는다. 그리고 비행기 출장도 자제하는데 어쩔 수 없이 비행기를 탈 때는 항상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 티백은 몇 번을 우려내 마셨고 식당에서 제공하는 1회용 설탕, 후추, 소금은 주머니에 챙겼다.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는 항상 문을 닫기 전에 들어가 마감 세일 상품을 이용했다. 한번은 호텔 객실 미니바의 콜라를 마셨는데 그것이 아까워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다가 채워 넣었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이 같은 잉바르 캄프라드의 절약 정신은 이케아의 전통이자 철학이 되었다. 지금도 이케아 직원들은 400km 이상 출장에만 비행기(이코노미석)를 이용할 수 있고, 이면지도 꼭 활용해야 한다. 잉바르 캄파라드는 1976년 직원교육용 책자에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도덕적 죄악이다. 제한된 자원으로 최상의 결과를 내는 것이 이케아 방식이다’라는 문구를 명시했다. 그러나 잉바르 캄프라드가 돈을 쥐어짜는 것만으로 오늘의 이케아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는 과감한 결단, 세상의 변화를 읽는 혜안, 고객과의 약속은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는 고객 우선주의 정신, 직원들에게는 겸손하고 실수를 용서하는 배려의 리더십을 갖춘, 리더였다.

물론 잉바르 캄프라드가 갖고 있는 최고의 미덕이 ‘절약과 검소’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절약과 검소를 앞세워 저품질의 제품을 고객에게 파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절약이지만 그는 그 안에서 최고의 품질, 최상의 서비스를 강조했다. 기업가에게는 상충되는 두 가지 가치, 즉 ‘최상의 품질, 저렴한 가격’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전략과 액션 플랜이 있었기에 이케아의 신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좋은 재료로 비싼 가구를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능성에서 우수한 그리고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가구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다수의 편에 서야 한다. 이것이 이케아 정신이다”라고 말하며 이케아의 사명은 ‘많은 사람의 일상생활을 더 낫게 만든다’라고 강조했다.

잉바르 캄프라드를 연구하면 점점 괴팍한 스크루지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 매장을 다니며 직원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고 직원을 가족같이 여기는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리더’이다. 그는 매장에서 고객과 직접 대면하는 직원들의 생각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잉바르 캄프라드가 이케아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을 ‘현장에서 발견하는 우연과 즉흥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구를 분해해 납작한 상자에 넣는 방식, 고객 편의 위주의 쇼핑 동선, 매장 내에 저렴한 식당과 유아보호소 운영 등 오늘의 이케아를 상징하는 이러한 장치들을 바로 현장에서 찾은 것이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말한다. “경영 전략, 제품, 리더십 모두 단순해야 한다. 단순함이 미덕이다. 그 대신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항상 생각하라. 기업이든 사람이든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체는 시작되고 생명력을 잃을 수 있다.” 20세기 위대한 가구 상인, 아니 유통 거인 잉바르 캄프라드. 그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직원의 실수도 실수가 아닌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한 ‘인간 우선, 인간 존중’인 것이다.


▶17세에 창업, 고객의 욕망을 만족시키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1926년 스웨덴의 스몰란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이민자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였다. 잉바르 캄프라드의 ‘장사꾼 기질’은 어린 시절부터 그 싹이 보였다. 그는 5살에 스톡홀롬에서 사 온 성냥을 마을 사람들에게 되팔아 용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뒤 이 같은 방식으로 연필, 볼펜, 씨앗 등을 팔았고 11살 때는 자신이 번 돈으로 자전거와 타자기를 사기도 했다. 이렇게 용돈벌이로 시작한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7세 때였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1943년 실업학교를 졸업하고 카탈로그 상품 판매회사 이케아를 창업했다. 그때의 취급품목은 지갑, 스타킹, 엽서, 연필 등 주로 생활용품과 사무용품이었다. 이케아는 자신의 이름인 잉바르(Ingvar)의 I, 성 캄프라드(Kamprad)의 K, 그가 자란 스웨덴 남부 농장 엘름타뤼드(Elmtaryd)의 E, 농장이 있는 지역 아군나뤼드(Agunnaryd)의 A를 각각 따서 IKEA로 지었다.

캄프라드는 이케아를 시작하면서 예테보리의 상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면서 장사에도 열성이었다. 점차 취급 품목도 늘어나 시계, 넥타이, 양말 등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캄프라드는 삼림협회에 취직했다. 그곳에서도 잉바르의 ‘개인적인 상업 활동’은 계속되었다. 잉바르는 고급 시계를 사다가 협회의 간부들에게 팔았고 일일이 생산 공장을 다니면서 가장 싼 가격의 사무용품을 구입해 협회에 공급했다. 그의 ‘투잡’은 성공적이었다. 월급보다 장사로 벌어들이는 돈이 훨씬 많았다.

1947년, 캄프라드는 21세에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도 상관의 허락을 받아 통신판매업을 계속했다. 부대 인근에 지하실을 얻어 밤에는 그곳에서 카탈로그를 제작했고 우편발송 작업 또한 계속했다. 2년 후 군에서 제대한 그는 온 가족을 동원해 사업을 지속했다. 취급 상품은 늘어 잉바르 캄프리드는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며 장사에 매달렸다. 난독증이 있는 캄프라드는 회계나 주문 작업에 어려움이 있어 이는 부모님이 거의 도맡아 했다.

일손이 달리자 캄프라드는 직원을 채용했다. 1952년, 이케아의 첫 직원 스벤예테 한손이 입사했다. 캄프라드는 스벤예테와 ‘이렇게 많은 품목을 취급하는 것이 사업성이 있는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은 없을까?’를 논의한 후 잡화점 식 사업을 한 가지 품목을 취급하는 전문점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가구였다. 캄프라드는 정부 정책에 주목했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서민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주택 100만 가구를 짓기로 했다. 캄프라드는 주택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가구 수요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판단했다. 가구는 카탈로그 주문이 대부분이었고 실제로 소비자가 가구를 볼 수 있는 것은 전시장에 있는 소량의 고급 가구뿐이었다. 캄프라드는 소비자가 주택 다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구를 직접 보고 선택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1953년 캄프라드는 고객의 방문이 용이한 엘름홀트의 기차역 인근에 전시장을 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문을 연 캄프라드는 약 1000명의 고객이 방문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판단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캄프라드의 고객 위주, 고객을 생각하는 판매 전략이 주효했음을 보여주는 증표인 것이다.

▶우연에서 찾은 조립형 가구 아이디어

캄프라드는 전시장을 소비자의 욕구를 채우고,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고객들이 가구를 만져보고, 살펴보게 했다. 직원들은 고객과 많은 대화를 통해 고객들이 원하는 가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당시 스웨덴에서 가구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비싼 가격표는 고객을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캄프라드는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캄프라드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우수한 품질의 제품을 저렴하게 팔 수 있을까?” 캄프라드는 가구의 생산과 배달까지의 전 과정을 복기했다. 제품을 디자인하고, 좋은 나무로 완제품을 만들어 매장에 전시하고, 이를 고객이 선택하면 파손되지 않게 포장해, 고객의 집까지 배달하는 전 공정에서 줄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캄프라드는 우연히 이 해결책을 찾았다. 당시 이케아에는 길리스 룬드그렌이라는 디자이너가 있었다. 한번은 한 직원이 공장에서 가져온 큰 가구의 사진을 찍고 다시 통째로 큰 박스에 담았다. 하지만 넓은 상판에 붙어 있는 가구의 다리 4개는 의외로 포장하기도 어렵고 차에 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룬드그렌은 “다리를 일단 떼어내고 상판에 붙여 포장한 다음 다시 조립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며 제품을 분리했다. 그러자 포장도 줄어들어 차에 쉽게 옮길 수 있는 부피가 되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캄프라드는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제품을 분리해 포장하는 것이다.” 한 디자이너의 순간 응용력이 세계 최대의 가구회사 이케아 탄생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캄프라드는 ‘플랫 팩(flat pack)’ 즉 ‘부품을 상자에 담아 운반하고 이를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게 하는 가구’의 콘셉트를 세웠다. 캄프라드는 조립형 포장 가구의 수없이 많은 장점을 발견했다. 첫째, 가구의 파손을 줄일 수 있었다. 그동안 완제품을 배송하는 과정에서 조그만 흠이 생기는 등 파손이 많아 파손율도 높았고 배달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둘째는 전시공간의 효율적 이용이었다. 완제품 가구 하나만 전시하고 나머지는 포장한 채 보관해 물류 비용을 줄이면서 더 많은 제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셋째는 무엇보다 포장, 물류, 배달 비용을 줄이면서 가격 경쟁력에서 타사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객들이 직접 조립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였다. 캄프라드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고객들이 직접 조립하는 불편함은 높은 품질, 저렴한 가격으로 보상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판단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렌치와 드라이버, 볼트와 너트만으로 조립이 가능한 이케아의 가구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고객들은 저렴한 가격, 우수한 품질에다가 직접 가구를 완성하는 노력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캄프라드는 다시 한 번 “고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게으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디자인의 조립가구 생산을 지시했다. 캄프라드는 시장의 변화를 선도하는 결단력, 시장의 흐름을 읽어내는 예리한 눈을 가진 리더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리더였다.


▶49개국, 412개 매장, 이케아 제국

캄프라드는 1958년 대형 가구매장을 세웠다. 매장은 고객들로 넘쳐났다. 그들은 조립식 가구를 집으로 가져가 조립해 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하지만 이케아의 성장은 스웨덴의 기존 가구 업계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스웨덴 가구 조합은 이케아의 판매 방식으로 위기를 느끼자 이케아를 가구 협회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가구 박람회 참가도 금지시켰다. 그들로서는 이케아의 대량 판매, 저렴한 가격 등을 ‘동업자 의식’이 없는 기업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는 이케아 불매 운동으로까지 펴져나갔고, 이케아 제품에 대한 표절 시비, 하청 생산 중지, 원목 공급 중지 등 조직적 반발로 이어져 나갔다.

캄프라드는 시련에 부딪쳤다. 그는 결국 이케아의 생산 공장을 스웨덴에서 철수, 노동 비용이 상대적으로 싼 동유럽으로 옮겼다. 이때의 좌절감으로 캄프라드는 한때 알코올 중독에 빠져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캄프라드는 좌절은 겪었지만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이를 전화위복으로 생각했다. 폴란드 등의 공장에서는 저렴한 인건비로 원가를 더 낮출 수 있었고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이케아는 더 성장했고 명성은 더 높아갔다.

캄프라드는 1976년 이른바 ‘가구 판매업자 헌장’을 만들었다. 이 헌장에는 캄프라드의 경영철학, 이케아의 기업 사명과 캄프라드의 리더십이 모두 담겼다. 캄프라드는 “우리 물건을 사지 못하거나 사지 않는 사람들에까지 우리 상품을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불가능’이란 말은 이제 지워버려야 한다. 미래를 위해 달려가자. 더욱 싸게, 더욱 좋은 제품을 공급하는 것이 ‘이케아의 임무’이다”라고 밝혔다.

캄프라드는 더 깊게 생각했다. 그는 ‘기업의 성공’이 단지 싼 제품, 좋은 품질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캄프라드는 약속과 신뢰가 기업 성장의 핵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케아는 고객과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또 하나의 원칙을 정했다. 그는 카탈로그를 보고 찾아온 고객이 느끼는 가장 큰 당혹감은 카탈로그와 다른 가격표라고 생각했다. 캄프라드는 ‘고객을 당혹스럽게, 혹은 배반감을 주는 모든 행동은 기업의 적’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카탈로그에 표시된 가격은 중간에 원가 상승 요인이 발생해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무조건 1년간은 유지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이 원칙은 전 세계 모든 매장에 동일하게 적용했고 1970년대 중동전 이후 세계적인 유가파동, 원목 가격 상승 등의 위기 때도 지켜나갔다. 이는 이케아를 성장시키는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이케아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1970년대, 스위스, 캐나다, 1980년대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 1990년대는 동유럽으로, 2000년대 들어오면서 이케아는 러시아, 중국, 아시아에 잇달아 매장을 설립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쇼핑 보상’, 새로운 판매 기법

이케아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캄프라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에게 만족은 정체이자 도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고객이 이케아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 이케아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고민했다. 그러면서 캄프라드는 두 가지를 이케아에 적용시켰다. 그것은 ‘절대 상품’과 ‘쇼핑 보상’이었다.

‘절대 상품’은 이케아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대 상품이다. 캄프라드는 “이케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상품들이 최소한 10여 개 이상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고객이 보는 순간, 헉 소리가 날 정도의 가격이고, 대신 품질은 우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이케아는 석재 컵을 내놓았다. 시중 가격의 약 1/3 수준이었다. 소비자들은 가격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석재 컵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또 하나 ‘쇼핑 보상’은 음식이었다. 무거운 제품을 쇼핑하고 계산대를 나서는 순간 고객들은 식욕을 자극하는 핫도그 냄새의 유혹에 자연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핫도그, 음료, 아이스크림 등을 시중보다 절반 가격에 팔고 있었다. 고객들은 힘든 쇼핑을 마친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맛있고 싼 핫도그를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을 먹으면서 고객들은 다시 한 번 이케아는 ‘무엇이든 싸고 좋다’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캄프라드는 저렴하고 맛있는 핫도그를 만들기 위해 이번에는 음식 전문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난상토론 끝에 캄프라드가 내린 결론은 ‘핫도그 DIY’였다. 이는 매장에서 핫도그가 든 빵을 받은 고객은 본인이 직접 양파와 피클을 넣고 각종 소스를 뿌려 자신만의 핫도그를 만들어 먹는 방식이다. 최소의 직원이, 아주 빠르게 핫도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방식으로 인해 핫도그는 이케아의 또 다른 시그니쳐 메뉴가 되었다. 이케아가 이 핫도그를 공식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1995년, 캄프라드의 나이 70세 때이다. 캄프라드의 열정과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캄프라드에게 원가 절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은 거의 종교수준이었다. 그는 1300여 개에 달하는 생산 공장에서 새로운 재료로 제품을 연구하고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제품 개발에 아이디어를 얻는 것에도 그 예민한 감각을 늦추지 않았다. 한번은 캄프라드가 중국의 재래시장을 구경했다. 그곳에서 캄프라드는 털을 뽑힌 채 매대에 쌓여있는 닭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닭깃털을 쓰레기로 버리고 있었다. 캄프라드는 이를 전량 수입해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었다. 각종 이불, 베개 등 침구류들이 그것들이다. 닭털을 가공한 이케아의 침구류는 기존 오리나 거위털 침구류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수백 만 개가 팔려나가는 빅히트를 기록했다. 잉바르 캄프라드의 열정과 아이디어의 산물인 것이다.


▶‘탈세, 거짓 절약’, 이중적 모습 비판

가구 및 종합 유통회사 이케아를 완성한 위대한 상인 캄프라드. 물론 그에게도 실수는 있었고 의혹 역시 끊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극우 파시스트 가담 전력과 탈세 의혹이다. 캄프라드는 20대 시절 1940년대 유럽을 휩쓴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한 극우단체 ‘새 스웨덴 운동’에 가입해 활동했다. 훗날 이 같은 전력이 밝혀지며 논란과 여론의 비판이 있자 그는 공개적으로 이를 사과했다. 캄프라드는 1994년 당시 2만5000여 명의 이케아 전 직원에게 편지를 통해 “당시 나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 지금도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것은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이며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1950년대 파시스트와 단절했다”고 고백했다.

또 하나는 탈세와 ‘거짓 구두쇠’ 의혹이다. 캄프라드는 1973년 스웨덴의 이른바 ‘부자세’를 피해 덴마크로 주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3년 뒤 그가 평생을 살다시피 한 스위스 로잔으로 이주했다. 캄프라드가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2014년이니까 캄프라드는 거의 40년을 스웨덴을 떠나 있었다.

캄프라드는 1982년 회사를 분할했다. 이케아는 네덜란드에 설립한 지주회사 인터 이케아와 전 세계 매장을 운영하는 이케아그룹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케아그룹이 인터 이케아에게 발생하는 판매금액 3%를 브랜드 로열티를 주는 구조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리히텐슈타인에 있는 재단 2곳, 스타칭 잉카재단과 잉카 홀딩스가 인터 이케아를 지배하고 이 재단은 캄프라드의 세 아들이 지배하는 구조이다. 일부에서는 이 재단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선이나 기부보다는 캄프라드와 이케아의 탈세와 절세를 위한 수단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캄프라드가 수도승을 연상시킬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것도 사실은 탈세 의혹을 피하고 이케아 직원들에게 근면·절약을 강요하려는 ‘계산된 행동’이란 비판도 있었다. 그의 지독할 정도의 구두쇠 정신이 단지 이케아 직원들의 절약을 강조하기 위해 ‘위장 행동’이라는 지적인 것이다. 그는 스웨덴과 스위스에 엄청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프로방스에는 와이너리도 있고 낡은 볼보는 대외용이며 평소에는 포르셰를 타고 다닌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캄프라드를 옆에서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은 “캄프라드가 평생 지켜온 가치는 이케아나 그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됐다. 그는 겸손하고 검소하며 매우 근면한 사람이다”고 캄프라드를 평가했다.


▷#리더십 | 시간, 돈 그리고 사람을 아껴라!

은둔의 리더 잉바르 캄프라드. 완고한 노인 같은 이미지와 빈틈없는 경영으로 인해 그에게는 ‘독재자’라는 별명도 있지만 캄프라드의 진면목은 이케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케아는 열린 공간이며, 다수의 사람들에게 더 나은 생활을 제공하는 곳이다. 이 같은 이케아의 가치를 일부 학자들은 ‘민주주의 개념’이라고 평가한다.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한 잉바르 캄프라드의 리더십의 결실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를 영국의 신문 <가디언>은 “이케아는 맥도널드와 함께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계급과 문화, 지역 장벽을 초월해 다수에게 사랑 받는 기업이다”라고 평가했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이케아의 직원들에게 ‘세 가지를 아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돈, 시간, 사람’이다. 그는 사람 즉 직원들에게도 ‘존경과 신뢰’를 갖고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조직에 구체적으로 적용했다. 이케아에는 독특한 면허증이 존재한다. 그것은 ‘실수 면허증’이다. 캄프라드는 “우리 회사에서도 직원들이 실수를 할까 두려워한다. 그런데 실수를 두려워하는 것은 관리 편의이고 모든 발전의 적이다. 조직에서 누구의 결정도 100% 옳은 결정은 없다. 우리는 실수를 얼마든지 허락한다. 그래서 나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직원들을 위해 일종의 ‘실수 면허증’을 만들어주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도전과 창의성, 열정의 기업 문화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캄프라드는 솔선수범, 현장경영을 통해 직원과 고객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이를 이케아의 경영에 반영하는 신뢰의 리더십을 펼치면서 직원들에게 “이케아는 물건을 파는 회사가 아니다. 이케아는 문화를 파는 회사”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누가 잉바르 캄프라드에게 물었다. “회장님은 세계적인 가구회사인 이케아를 창업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은 리더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잉바르 캄프라드는 대답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만약에 리더에게, 조직이, 직원들 모두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 기업은 아무리 큰 조직이라고 금방 붕괴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실수 면허증’을 만들고 조직을 ‘사랑’으로 경영했던 잉바르 캄프라드. 그가 만든 절약과 근면을 최고 미덕으로 여기는 ‘짠내 나는 기업’ 이케아는 이제 100년 기업을 향해 전진 중이다. 비록 창업주 잉바르 캄프라드는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의 이케아에는 ‘3가지가 넘쳐난다.’ 그것은 시간과 돈 그리고 가장 소중한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도전정신이다. 새로운 제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판매 방식, 새로운 기업의 가치…. 이 유산을 남긴 리더가 바로 잉바르 캄프라드인 것이다.
 
 
 
 
이전글   사랑의 콩깍지
다음글   알코올 중독, 습관 아닌 ‘질병’…전문 치료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