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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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진/영상
작성자  산남자 작성일  2019.05.30 14:55 조회수 520 추천 0
제목
 모국,대한민국의 오늘(27)  
 

마니산,,,(강화도)










































































참성단 모형...














주막~


초가집에서 햄버거를 !?!?












































 
 
산남자 (2019.05.31 05:24)  신고
강화 덕진진과 광성보

강화도에는 선사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전 시기를 아우르는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강화도의 역사적 위상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유적은 서해를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건설한 수많은 ‘관방關防유적’들이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모든 종류의 관방유적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남자 (2019.05.31 05:25)  신고
해상 침입로를 지켜온 바다의 요새

인천광역시에 속해있는 큰 섬 강화도와 뭍을 나누는 좁다란 바닷길을 흔히 ‘염하鹽河’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 ‘물맛이 짠 강’이라는 뜻이다. 엄연한 바다를 두고 강이라 한 것이니, 모르긴 모르되 이 말 속에는 ‘너도 바다라고 할 수 있느냐?’는 식의 빈정거림이 담겨있는 듯하다.
실제로 염하는 바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좁은 물길이다. 폭이 좁은 곳은 고작 200~300m에 불과하고 아주 넓은 곳도 1㎞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변변치 못한 바다 염하야말로 강화도라는 섬의 역사와 아이덴티티를 가장 잘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뭍이나 다름없는 섬이었으니 뭍이 당해야 했던 역사적 영욕을 고스란히 함께 당했고, 그러면서도 ‘섬’이었으므로 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역할을 또한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이나 조선시대 병자호란과 같은 난리에 조정이 이곳을 피난처로 정한 것이나 조선 말, 수도 한양을 넘보는 서양 세력을 이곳에서 막아내려 했던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런 까닭에 강화도에는 멀리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전 시기를 아우르는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강화도의 역사적 위상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유적은 서해를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건설한 수많은 ‘관방關防유적’들이다. 실제로 강화도는 성곽城郭은 물론, 봉수烽燧, 진鎭과 보堡, 돈대墩臺, 포대砲臺 등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모든 종류의 전통 관방유적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남자 (2019.05.31 05:25)  신고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섬의 핵심부를 보호하고 뭍과 가까운 염하의 물줄기를 따라 수많은 진과 보, 돈대, 포대를 설치해 2중 3중의 방어막을 구축했다. 이렇게 세워진 군사시설은 흔히 12진보 54돈대 8포대로 요약된다. 한마디로 강화도는 섬 전체가 군사기지였던 셈이다.
강화도의 요새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을 겪고 난 이후였다. 심양瀋陽에 볼모로 붙들려 있다 귀국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의 눈초리를 피해가며 강화도를 요새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 프로젝트는 현종을 거쳐 숙종 대에 이르러 가시적인 결실을 맺게 된다. 숙종은 1679년, 영의정 허적許積의 건의를 받아들여 바닷가 요처에 토성과 함께 49곳의 돈대를 쌓는다. 이후 강화도는 우리 역사 최대의 격변기라 할 수 있는 근대의 문턱에서 이른바 ‘근대화의 진통과 시련’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전진기지로 다시금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19세기 중엽, 이른바 서세西勢의 물결이 도도하게 이 땅을 덮쳐왔을 때, 조선은 그들 나라와 교류를 할 만한 준비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조선이 상대해 온 이웃 나라라고 해야 전통적으로 사대의 예를 다하던 중국과 오랑캐로 여겨오던 왜倭, 유구流球, 여진女眞 등이 전부였다. 그러했던 조선에게 막무가내로 밀려오는 서양세력은 그 자체가 감당하기에 벅찬 도전이었다. 더욱이 내부적으로는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민란民亂이 끊이지 않는 등 봉건왕조의 말기적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 정권은 이러한 내부 문제조차 수습할만한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산남자 (2019.05.31 05:26)  신고
어쨌든 과감히 나라의 문을 열고 이들 서양 세력과 교류를 할 능력도 자신도 전혀 없었던 조선의 지배층은 가장 간단명료한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나라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일체의 서양 것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이른바 ‘쇄국정책’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이미 암암리에 밀려들어와 자신들의 기득권을 뒷받침해 주던 전통적인 사상과 믿음을 헷갈리게 만드는 서양의 문물을 일소하기 위해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왕권을 강화해 나라의 기강을 다잡으려 했다. 이를테면 시대의 큰 흐름을 외면하고 도리어 시대를 거슬러 중세적 질서로의 회귀를 택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한말의 풍운아 ‘흥선興宣 대원군大院君’이었다.

두 차례 양요의 최대 격전지

흥선 대원군은 내정內政에서는 일련의 긍정적인 조처를 취해 위기를 수습하기도 했지만, 문호의 개방이라든가 근대화와 같은 거대한 아젠다를 소화하고 추진해나갈 만한 역량은 갖추지 못한 봉건적인 지도자였다. 대원군의 시대착오적 사고와 정책은 대원군 개인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대원군의 섭정을 지지했던 당시 조선 정권 전체의 한계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대외적인 책략에서는 철저하게 수구적 자세를 굳게 지켰다.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서양세력에 대해서는 똑같이 무력으로 맞섰다. 이런 과정에서 빚어진 서양세력과의 마찰이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병인양요는 조선 정부의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에 대한 항의와 함께 문호개방과 통상을 요구했던 프랑스 군대와의 싸움이었고, 신미양요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공격을 빌미삼아 통상을 요구했던 미국 함대와의 싸움이었다.
산남자 (2019.05.31 05:27)  신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로즈(G. Roze) 제독이 이끄는 4척의 군함과 9백여 명의 병력으로 별다른 저항 없이 갑곶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곧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군의 매복 기습작전에 허를 찔려 정족산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물러나게 된다.
이 승리로 기세가 오른 대원군은 제너럴셔먼호 소각사건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협박성 요구에 대해서도 똑같이 강경한 방식으로 맞선다. 미국은 마지막 경고까지 먹혀들지 않자 마침내 1871년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를 앞세워 조선 원정에 나선다.
그해 6월 10일에 있었던 강화도 상륙작전에는 상륙병력 6백44명, 지원병력 1백90명 정도가 동원되었다. 당시 주요 방어선이었던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에 배치된 조선군 병력은 3천 명 정도였다. 수적으로 보면 조선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그 대부분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오합지졸이었고 무기 또한 대완구, 불랑기, 화승총 등 전근대적 화기火器 뿐이었다. 반면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실전경험을 쌓은 정예부대인데다, 무기 또한 대포, 야포, 레밍턴 소총, 연발 권총 등 성능이 검증된 최신식 무기였다.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미군은 우수한 화기를 동원, 무차별 함포 사격으로 조선군의 진지를 초토화시킨 후 보트를 이용해 해안에 상륙, 돌격하는 작전을 썼다. 덕진진이 무너지고 이튿날에는 광성보가 무너졌다. 광성보 전투에서는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군이 목숨을 걸고 항전했으나 6백여 명의 수비군 거의가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들의 처절하면서도 용감한 항전에 대해 미국 측 문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남자 (2019.05.31 05:31)  신고
“조선군은 전근대적 노후한 병기를 가지고 미군의 현대적 총포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용감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결국 통상요구를 관철하는 데 실패했고, 조선은 이렇듯 참혹한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끝내 나라의 문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이후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다졌다.

염하의 급류와도 같은 근대화의 진통

강화도에 세워졌던 12진 54돈대는 이후 세월의 격량에 휩싸이는 동안 무너지고 유실되어 온존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 그나마 신미양요의 주요 격전지였던 덕진진과 광성보 정도가 수년에 걸친 복원 작업을 통해 그 중 잘 정비가 되어 있는 곳이다.
‘진鎭’ ‘보堡’ ‘돈대墩臺’는 거의 같은 기능을 가진 시설들이긴 하나 굳이 구분을 하자면, ‘진’은 말 그대로 군사적인 기지를 말하는 것이고 ‘보’는 해안에 세운 작은 규모의 성곽을 말한다. 돈대는 지형이 높은 곳에 세워 적의 동향을 감시하는 망루나 파수대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규모로 보면 ‘진’이 가장 큰 개념이고 그 다음이 ‘보’와 ‘돈’의 순서다. 돈대는 필요한 곳에 별도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2~5개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포격시설인 ‘포대’와 함께 보나 진에 속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산남자 (2019.05.31 05:31)  신고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 비교적 잘 단장된 관방유적들은 모두 김포 해안이 마주보이는 염하 물줄기를 따라 이어져 있으므로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대교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보면 모두 만날 수 있다.
사적 제 226호로 지정된 덕진진은 앞서 말했듯, 신미양요 당시 격전지 중의 하나이다. 내부에 덕진돈대와 남장포대를 포함하고 있다. 덕진돈대는 광성보와 초지진 중간에 위치한 돈대로 강화 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 역할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닷가에 접해있는 장방형 돈대로 4문의 포를 설치했던 포좌가 있다.
덕진진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는 남장포대이다. 바다 쪽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는 반달형 요새로 15문의 포좌를 지녀 강화의 8포대 중 가장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던 곳이다. 현재의 포대는 1977년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덕진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 중군이 거의 전원이 전사할 만큼 처절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 사적 227호로 지정된 유적지이다. 그 안에는 당시의 처절한 전투를 되살리게 하는 몇몇 유적들이 남아있는데, ‘쌍충비각’과 ‘신미순의총’이 그것이다. 쌍충비각은 광성보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어재연, 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고 신미순의총은 당시 전투에서 사망한 이름 모를 용사들의 시신 50여 구를 7기의 분묘에 합장한 묘역이다.
산남자 (2019.05.31 05:34)  신고

광성보 내부에는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등 3개의 돈대가 있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돈대가 용두돈대이다. 염하를 따라 용머리처럼 튀어나온 자연 지형 위에 축조된 성곽인데, 바다에 가장 가깝게 붙어 있어 치열한 전적지라는 사실을 깜박 잊을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성벽에 성가퀴가 있기는 하나 특별한 전투 시설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덕진진에 속한 덕진돈대 조용한 앞 바닷가에는 ‘바다의 척화비’라고 불리는 ‘해안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병인양요 이듬해 대원군의 명으로 세워졌다는 비석이다. 총탄의 상흔이 역력한 화강암 비면에는 이런 글귀가 씌여 있다. “海門防守 他國船愼勿過-바다의 문을 지키고 있으니 다른 나라 배들은 삼가 지나다니지 말 것”
염하의 드센 물줄기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서 있는 쓸쓸한 자태가 격랑의 세계사에 내던져진 조선 왕조의 처연한 뒷모습을 보는 듯 가슴이 아프다!!! ^^*

산남자 (2019.05.31 13:19)  신고

덕진진 입구

덕진진 입구

산남자 (2019.05.31 13:21)  신고

광성보의 입구인 안해루 전경

광성모의 입구인  안해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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