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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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진/영상
작성자  산남자 작성일  2019.06.22 19:18 조회수 357 추천 0
제목
 공주,계룡산,부여를,,,1박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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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자 (2019.06.22 19:26)  신고
640년(신라 선덕여왕 9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월정사와 통도사를 창건할 때 선덕여왕에게 토지 200결을 받아 전탑을 세우고 이곳 마곡사도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명종 때(1172년)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고 범일이 재건하였다.그뒤 보철화상이 주석할 때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이 삼대처럼 빽빽하게 많아서 마곡사라는 절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절이 폐사되고 이곳도 200년 가량 도둑의 소굴이 되었는데, 고려 명종 2년(1172년)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도둑떼를 몰아낸 후 제자 수우스님과 함께 대규모 불사를 벌여 중창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세조가 이 절에 거둥해서 영산전 현판을 친필로 남기기도 하고 자신이 타고 온 가마를 두고 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1651년(효종 2년)에 대웅전, 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중건했다. 근대에 들어서 구한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탈옥한 뒤에 이곳으로 피신해서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출가 생활을 했다. 지금 대광보전 앞 향나무는 당시 김구 선생이 직접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산남자 (2019.06.22 19:29)  신고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이 북한산이다. 조선의 진산으로 500년의 역사를 굽어보는 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의 진산이 될 뻔했던 산이 있다. 바로 대전과 공주와 논산과 계룡시에 걸쳐 있는 계룡산(845.1m)이다.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지금의 계룡시)에 도읍을 정하려고 할 때 그의 스승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요,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하여 닭(鷄)과 용(龍)을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를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고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한다.
산남자 (2019.06.22 19:32)  신고
황금닭이 알을 품고 용이 하늘로 올라간 형세라는 계룡산의 산세가 사방으로 쭉 펼쳐져 있다.

실제로 정상 천황봉에서 삼불봉을 잇는 능선과 봉우리의 모습이 닭벼슬처럼 생겼고, 삼불봉에서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봉우리가 마치 꿈틀거리는 용의 몸처럼 보인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상서로운 동물이며, 용은 왕과 같이 지극히 높은 자에 대한 상징으로 계룡산은 새벽을 먼저 알리고 선지자적 상징과 고고함을 갖춰 무학대사가 이곳에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산남자 (2019.06.22 19:35)  신고
계룡산에 있는 유명한 절로는 동학사와 갑사 등이 있다. 동학사는 계룡산 동쪽 계곡 사이에 자리한 사찰로 비구니의 불교강원으로 유명하다. 신라 성덕왕 23년(724) 상원조사의 발원으로 회의화상이 창건했으며, 고려초 도선국사가 중건하고 고종 원년(1864)에 크게 개수한 절이다.

갑사는 백제 구이신황 원년(420)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로, 연천봉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중수한 뒤 화엄종 도량을 개설, 화엄종 10대 종찰의 하나가 됐다.

계룡산의 명물인 남매탑 혹은 오누이탑. 둘 다 보물이 지정된 유물이다.

계룡산 중턱 쯤 올라가면 보물로 지정된 오누이탑, 일명 남매탑이 나온다. 거기에 얽힌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 스님이 계룡산에 들어와 토굴을 파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스님이 어려움에 처한 호랑이를 구해주자 호랑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리따운 처녀를 등에 업고와 놓고 갔다. 처녀는 혼인날 호랑이에게 물려 이곳까지 오게 됐다. 스님은 여인을 며칠 머물게 한 뒤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그 처녀의 부모는 모든 일이 너무 신령스러워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둘이 부부의 예를 갖추길 바랬다. 이에 스님은 그 처녀와 남매의 의를 맺고 비구와 비구니로서 수행을 하다 한낱한시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두사람의 아름다운 행적을 기리고자 석탑 2기를 쌓고 남매탑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나는 청량사지오층석탑으로 보물 제1284호이고, 다른 하나는 청량사지칠층석탑으로 보물 제1285호로 지정됐다.
산남자 (2019.06.22 19:48)  신고
724년(성덕왕 23)상원(上願)이 암자를 지었던 곳에 회의(懷義)가 절을 창건하여 청량사(淸凉寺)라 하였고, 920년(태조 3)도선(道詵)이 중창한 뒤 태조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936년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기 위해 동학사(東鶴祠)를 지었다. 그리고 사찰을 확장한 뒤 절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꾸었다.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으므로 동학사(東鶴寺)라 하였다는 설과, 고려의 충신이자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인 정몽주(鄭夢周)를 이 절에 제향하였으므로 동학사(東學寺)라 하였다는 설이 함께 전해진다.

1394년(태조 3)고려의 유신(遺臣) 길재(吉再)가 동학사의 승려 운선(雲禪)과 함께 단(壇)을 쌓아서 고려태조를 비롯한 충정왕·공민왕의 초혼제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1399년(정종 1)고려 유신 유방택(柳芳澤)이 이 절에 와서 정몽주·이색(李穡)·길재 등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다음해 이정한(李貞翰)이 공주목사로 와서 단의 이름을 삼은단(三隱壇)이라 하고, 또 전각을 지어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산남자 (2019.06.22 19:48)  신고


산남자 (2019.06.22 19:54)  신고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 백제 시대에는 사비성(泗沘城)이라 불렸다. 부여군 부여읍의 서쪽에 금강을 낀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레는 대략 2.2km, 면적은 약 74만m2에 달한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부소산성은 부소산 정상에 테뫼식 산성을 쌓은 후, 주변을 포곡식으로 쌓은 복합 산성이다. 부소산성 주변에는 다시 청산성과 청마산성 등의 보조 성이 있으며, 남쪽에는 성흥산성의 지원을 받았다. 과거의 군수품 창고 터 등이 남아 있으며, 그 외에도 낙화암과 고란사 등이 있다.
산남자 (2019.06.22 20:03)  신고
보통 부여를 방문하게 되면 백제의 도읍인 사비(泗沘)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부여에서 만날 수 있는 백제의 흔적은 생각처럼 많지는 않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 사비성의 안과 밖을 구분했던 부여 나성 ▲ 백제 왕실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과 능산리사지 ▲ 단 2기만 남은 백제 석탑 가운데 하나인 정림사지 오층석탑 ▲ 백제 시대의 왕궁지로 여겨지는 관북리 유적과 피난산성 개념의 부소산성 ▲ 백제 때 만들어진 저수지 궁남지(宮南池) 등이 남아 있다.

이 외에 많은 사람들이 낙화암(落花巖)에 대해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앞서 삼천궁녀와 관련한 기사를 통해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문학적인 표현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럼에도 부여를 떠올리면 낙화암이 생각나는 건 그만큼 상징적인 표현으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낙화암을 보기 위해서는 부소산성을 통해 도보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고, 구드래 나루터에서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에서 낙화암을 바라보거나, 고란사 선착장을 통해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산남자 (2019.06.22 20:05)  신고
생각해보면 고대 사회에서 도읍은 강을 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교통이나 수송의 편리성 때문으로,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백마강과 사비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백마강을 중심으로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백제를 포함해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즉 백마강에 담긴 역사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도 백제, 더 나아가 부여를 바라보는 시각을 좀 더 확장시켜준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낙화암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삼천궁녀의 설화가 전하는 곳으로, 본래는 타사암(墮死巖)으로 불렸던 곳이다. 그러다 문학적인 표현으로 삼천궁녀의 이미지가 더해지고, 궁녀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잎처럼 보여서 낙화암이라 불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삼천궁녀의 설화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사비성의 함락과 함께 일부 후궁들이 뛰어내렸을 개연성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장소가 주는 여운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낙화암과 함께 주목해볼 장소로 고란사(皐蘭寺)를 들 수 있는데, 삼천궁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다. 특히 고란사 사찰의 벽화에는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 낙화암과 함께 보면 좋다.
산남자 (2019.06.22 20:10)  신고
한편 고란사 선착장 옆 돌출된 바위가 이목을 끄는데, 이 바위의 이름은 조룡대(釣龍臺)다. <삼국유사>에서는 용암(龍巖)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바위는 당나라의 소정방이 강에 살던 어룡(=용이라고도 한다)을 낚았는데, 이때 미끼로 쓴 것이 백마였다고 한다. 이에 금강 중 해당 구간을 백마강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물론 설화의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서의 의미는 부여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룡대의 전설이 백마강의 유래가 되었다는 내용은 나름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바라볼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위 사진의 황포돛배를 타고 낙화암과 고란사, 조룡대를 보기 위해서는 구드래 나루터로 가야 한다. 구드래 나루터는 사비성의 나루이자 동시에 무역항의 기능을 했던 곳이다. 지금도 부여의 농특산물 공동브랜드의 이름이 ‘굿뜨래’로 불리고 있다. 일본어 중 ‘구다라’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백제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타국의 상인이나 사신들이 처음 입항하는 나루에서부터 ‘구드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산남자 (2019.06.22 20: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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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자 (2019.06.22 21:12)  신고
「꿈꾸는 백마강」은 옛말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그립구나….』
그동안 신라우위의 역사관으로 가뜩이나 그 개발과 발굴에 소홀해왔던 백제문화의 젖줄 백마강의 경관이 유행가 『꿈꾸는 백마강』의 노래가사처럼 모래속에 묻혀 잊혀질 위기를 맞고있다.

"수지 안맞는다" 부여군서 준설 외면|토사쌓여 바닥 드러나|낙화암아래 유람선도 통행 힘들어질듯
백마강은 대청댐의 건설로 수량이 10년전에 비해 절반이상 줄어든데다 4년전 한국수자원공사 금강용수관리소의 취수탑이 건설돼 수로가 변경되면서 백마강은 수심이 더욱 낮아지고 모래가 쌓여 유람선의 통행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백마강은 원래 부소산의 낙화암·고란사와 더불어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뱃놀이와 함께 하는 명승고적 관람이 부여 8경중 으뜸으로 꼽혔다.
특히 백제의 고도 부여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물론 충남도민 모두에게 백마강은 영원한 백제 혼의 상징으로 가슴속에 남아있다.
의자왕과 3천궁녀의 퇴폐적이고 망국적인 향락의 이미지가 아니라 외세에 목숨으로 저항한 자주정신의 상징으로 새롭게 조명되는 낙화암.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던 소정방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백마강에 뛰어들어 용으로 변신했다는 의자왕 왕비의 전설이 서려있는 조룡대.
백마강의 역사적 경관이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했다..
산남자 (2019.06.22 21:15)  신고
백마강은 원래 백제대교에서 조룡대 앞까지의 금강을 일컫는 이름. 길이4km, 폭4백m로 강 면적은 모두 50여만평이 된다.
그러나 대청댐과 취수탑 등이 들어서는 바람에 현재 강의 면적중 3분의2이상인 36만평이 모래밭으로 변했고 강폭은 절반인 2백m로 줄었으며 특히 조룡대앞은 그 폭이 40m도 채 안될 정도로 좁아졌다.
8년 전만해도 낙화암 조룡대 부근의 수심이 8m로 백마강에서는 비교적 깊은 곳이었으나 지금은 모래적체현상으로 곳에 따라서는 수심이 30cm밖에 안돼 강바닥이 드러나고 있는 실정.
취수탑 등으로 하루3m씩 토사가 계속 쌓여 조룡대앞 1만여평은 모래섬으로 변해가고 있다.
현재까지는 조룡대에서 15m쯤 떨어진 낙화암까지 20여척의 유람선이 근근히 운항되고 있지만 앞으로 2∼3개월이면 그마저 어려우리라는게 관계자들의 걱정이다.
결국 백마강 뱃놀이는 없어져버릴지 모른다는 얘기다.
10년만에 백마강을 다시 찾았다는 한 관광객은 『10년 전에는 조룡대 부근경관이 아름답고 물줄기가 맑아 낙화암을 배경으로 한폭의 그림 같았는데 지금 와보니 강이 아니라 개천이라고 해야겠다』며 변화된 강 모습에 안타까와했다.
산남자 (2019.06.22 21:16)  신고
이 지역주민들 사이에서는 토사와 자갈을 채취해 팔아 이룩한 한강개발방식이 백마강에서도 이뤄질수 없을까하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유람선의 수입에 생계를 걸고있는 3백여명의 유선조합종사자들과 이들로부터 연간 1억7천만원이나 되는 조세수입에 의존하고있는 부여군 등이 이같은 백마강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밀린 토사가 건축자재용으론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에 적극 나서야할 부여군과 금강용수관리소측이 서로 적극적인 사업추진염두를 못낸채 준설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실정.
부여군은 관리소측이 취수가 어렵다는 이유로 쌓인 모래밑에 취수관을 묻어 물 흐름이 느려지면서 더 많은 토사가 쌓이고 강물오염까지 가증시켰다며 금강용수 관리소측의 무책임을 나무라고 있다.
산남자 (2019.06.22 21:18)  신고
그러나 금강용수개발사무소측은 『수도물 값이 동결돼 연간50억원의 적자가 나는 판이라 송수관의 안전 및 트럭의 기름유출에 따른 오염방지 등 군이 적절한 보완책을 제시하지 않는 한 응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모든 허가권을 쥐고 있는 부여군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길밖에 해결책은 없습니다. 도 차원에서도 물론 배려해야할 것입니다. 백마강은 부여의 것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양측의 평행선을 긋는 책임회피에 주민들은 항의의 목소리가 높다.
부여군에 따르면 부소산을 거쳐 백마강을 유람하는 관광객은 하루평균 1천여명, 수학여행 등이 많은 봄·가을의 성수기에는 1만여명이 넘는다.
따라서 12만뎡의 부여인구로 보면 결코 적지않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으며 그만큼 부여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그런데도 예산이 없고 당장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백마강이 모래속에 묻혀 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될것이라는게 주민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오늘도 당국의 책임회피로 조금씩 사라져가는 백마강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은 쌓여가는 모래만큼이나 안타까움과 분노에 싸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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